성경의 숨은 재밌는 이야기

에베소서의 숨은 이야기

아르테미스 신전이 서 있던 도시, 마술책이 불태워지던 광장, 감옥의 사슬 소리. 에베소서 여섯 장을 한 구절씩 걸으며 헬라어 단어 속 이야기와 그 시대의 풍경을 함께 만나 봅니다.

6장 155절기록 · 주후 60~62년경 로마 감옥전달자 · 두기고
보기
序

에베소라는 도시

편지를 읽기 전에 먼저 거리를 걸어 봅니다

에베소는 로마 제국 아시아 속주의 수도였고, 로마·알렉산드리아·안디옥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대도시였습니다. 항구에는 동방과 서방의 물건이 쏟아져 들어왔고, 도시 한가운데에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이 서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도시에서 약 3년을 머물렀습니다(행 20:31).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했고, 그 사이에 마술사들이 자기 책을 모아 불태웠으며, 그 값이 은 오만이나 되었다고 사도행전은 기록합니다(행 19:19). 은 1드라크마는 노동자 하루 품삯이었으니, 5만 드라크마는 한 사람이 하루도 쉬지 않고 137년을 일해야 버는 돈입니다. 2026년 최저임금(시급 10,320원, 하루 8시간)으로 계산하면 약 41억 원에 이릅니다.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일으킨 소동 때문에 2만 명 넘게 들어가는 대극장이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는 외침으로 두 시간 동안 들끓기도 했습니다.

127아르테미스 신전 기둥 수 (대 플리니우스 기록)
약 2만 5천에베소 대극장 수용 인원
3년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한 기간
약 41억 원불태운 마술책의 값 (은 5만 드라크마, 오늘날 최저임금 기준)
에베소 대극장 유적
에베소 대극장. 데메드리오의 소동 때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는 외침이 두 시간 동안 울려 퍼진 곳입니다(행 19:34).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에베소 유적은 오늘날 튀르키예 셀추크 근처에 있습니다. 지도를 보면 옛 항구 도시가 지금은 바다에서 약 5~6km 떨어진 내륙에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글 지도에서 크게 보기 ↗

이 편지는 정말 에베소에 보낸 것일까?

가장 오래된 사본들(P46, 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에는 1장 1절의 "에베소에 있는"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게다가 3년이나 함께 산 교회에 쓰면서 "너희 믿음을 들었다"(1:15),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3:2)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이 편지가 에베소를 중심으로 아시아 여러 교회에 돌려 읽힌 회람 편지였다고 봅니다. 2세기의 마르키온은 이 편지를 "라오디게아서"라고 불렀는데, 골로새서 4:16에 나오는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가 바로 이것일 수도 있습니다.

1

하늘에서 시작하는 찬송

택하심 · 구속 · 인치심, 그리고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

1:1

주소가 빠진 편지

앞에서 본 대로 초기 사본에는 수신지가 비어 있습니다. 편지를 필사해 여러 교회로 보낼 때 빈칸에 각 교회 이름을 넣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누가 받든 "성도들과 신실한 자들"이면 이 편지의 주인이라는 뜻이니, 오늘 우리도 수신인 명단에 들어 있는 셈입니다.

역사
1:2

두 문화의 인사를 한 줄에

헬라 사람들의 편지 인사는 보통 χαίρειν 카이레인("기뻐하라, 안녕")이었습니다. 바울은 발음이 비슷한 χάρις 카리스(은혜)로 바꾸고, 여기에 유대인의 인사 "샬롬"(평강)을 붙였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한 몸으로 묶는 이 편지의 주제가 첫 인사에서부터 들립니다.

원어
1:3

202단어짜리 한 문장

3절부터 14절까지는 헬라어로 단 하나의 문장입니다. 약 200여 단어가 쉼표 없이 이어지지요. 독일 고전학자 에두아르트 노르덴은 헬라어 문헌에서 가장 거대한 문장 덩어리라고 평했습니다. 바울이 문장을 끊지 못할 만큼 감격에 겨워 쏟아낸 찬송인 셈입니다.

또 "하늘에 속한"이라는 형용사(ἐπουράνιος) 자체는 고린도전서 15장, 히브리서 등에도 나오지만, "하늘에 속한 곳에서"(ἐν τοῖς ἐπουρανίοις)라는 장소 표현은 신약에서 에베소서에만 다섯 번 나옵니다(1:3, 1:20, 2:6, 3:10, 6:12). 이 편지의 무대는 처음부터 하늘입니다.

원어
1:4

기초를 던져 놓기 전에

"창세 전"의 "창세"(καταβολή 카타볼레)는 원래 "아래로 던져 놓음", 곧 건물의 기초를 놓는 일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우주의 주춧돌 하나 놓기 전에 이미 우리를 마음에 두셨다는 말입니다.

원어
1:5

로마의 입양은 달랐다

로마에서 입양(υἱοθεσία 휘오데시아)은 주로 성인을 대상으로 한 법적 절차였습니다. 입양되는 순간 이전의 빚은 모두 사라지고, 새 가문의 이름을 받으며, 친자와 똑같은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언으로 입양되어 훗날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된 이야기는 누구나 아는 사건이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이 단어를 들으며 가슴이 뛰었을 것입니다.

문화
1:6

"사랑하시는 자"라는 이름

헬라어 ἠγαπημένος 에가페메노스는 헬라어 구약(칠십인역)에서 이스라엘의 애칭 "여수룬"을 옮길 때 쓰인 말입니다(신 32:15). 예수님 침례 때 들린 "내 사랑하는 아들"과도 울림이 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받는 분 안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원어
1:7

노예 시장의 단어, 속량

"속량"(ἀπολύτρωσις 아폴뤼트로시스)은 몸값을 치르고 노예나 포로를 풀어 주는 일을 가리켰습니다. 에베소 같은 큰 항구 도시에서 노예 매매는 일상 풍경이었습니다. 그 값이 은이 아니라 "그의 피"였다는 데 이 구절의 무게가 있습니다.

로마 시대 노예 해방 부조
로마 시대 노예 해방 장면을 새긴 부조(벨기에 마리몽 왕립박물관). 몸값을 치르고 자유를 얻는 일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익숙한 풍경이었습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문화
1:8–9

숨기는 비밀, 드러내는 비밀

에베소 주변에는 입문한 사람만 비밀 의식을 알 수 있는 밀의(密儀) 종교가 가득했습니다. 그들에게 "비밀"(μυστήριον 뮈스테리온)은 소수만 아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같은 단어를 쓰면서 정반대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이제 모두에게 "알리신" 것이라고요.

역사
1:10

장부의 맨 위에 적는 합계

"통일되게 하려 하심"(ἀνακεφαλαιώσασθαι 아나케팔라이오사스타이)에는 "머리"(κεφαλή)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숫자를 모두 더한 뒤 그 합계를 칸 맨 위에 적었습니다. 흩어진 만물의 숫자를 다 더하면 그 맨 위에 적힐 이름이 그리스도라는 그림입니다. "경륜"(οἰκονομία 오이코노미아)은 집안 살림을 맡아 다스리는 일로, 오늘날 "이코노미"의 어원입니다.

원어
1:11

제비로 나눈 땅

"기업이 되었으니"의 뿌리는 제비(κλῆρος 클레로스)입니다. 여호수아 때 가나안 땅을 지파별로 제비 뽑아 나누던 장면이 배경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땅을 분깃으로 받았다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의 분깃이 되었습니다.

역사
1:12–13

"우리"와 "너희"가 만나는 자리

12절의 "그리스도께 먼저 바라던 우리"는 유대인 신자, 13절의 "너희도"는 이방인 신자를 가리킨다고 많은 주석가들은 봅니다. 긴 찬송 한가운데서 두 무리가 차례로 등장하고, 곧 같은 성령의 인을 받습니다. 2장에서 터져 나올 "둘로 하나를 만드사"가 여기서 미리 들립니다.

깊은 묵상
1:13

인장이 말해 주는 세 가지

고대 세계에서 인(σφραγίς 스프라기스)은 세 가지를 뜻했습니다. 이것이 누구의 소유인지, 이것이 진품인지, 그리고 봉인이 풀릴 때까지 안전하다는 보증입니다. 편지와 계약서, 창고의 물건에 찍힌 밀랍 인장처럼, 성령은 우리 위에 찍힌 하나님의 도장입니다.

문화
1:14

계약금, 그리고 약혼반지

"보증"(ἀρραβών 아라본)은 상거래에서 쓰던 계약금입니다. 나머지를 반드시 치르겠다는 약속으로 먼저 건네는 돈이지요. 재미있게도 현대 그리스어에서 이 단어(아라보나스)는 약혼, 약혼반지를 뜻합니다. 성령은 신랑이신 그리스도가 반드시 다시 오겠다며 끼워 준 반지입니다.

원어
1:15–16

들은 믿음을 위한 기도

찬송이 끝나자 바울은 곧바로 기도로 넘어갑니다. 에베소서 1장은 찬송, 3장은 무릎 꿇은 기도, 6장은 모든 기도로 끝납니다. 교리 설명이 아니라 예배 속에서 쓴 편지라는 점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깊은 묵상
1:17

이미 가진 사람들을 위한 기도

바울은 3~14절에서 "모든 신령한 복을 이미 주셨다"고 해 놓고, 곧바로 그것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문제는 복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모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깊은 묵상
1:18

마음에도 눈이 있다

성경에서 "마음"은 감정의 자리이기보다 생각하고 결정하는 인격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눈"은 감성이 아니라 삶 전체를 보는 시력을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심안(心眼)"과 비슷하지만 훨씬 넓은 말입니다.

문화
1:19

힘을 뜻하는 네 단어를 한꺼번에

이 한 절에 능력(δύναμις), 역사(ἐνέργεια), 위력(κράτος), 힘(ἰσχύς)이 모두 쌓여 있습니다. 헬라어로 "힘"을 뜻하는 단어를 거의 다 끌어온 것입니다. 알프레드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라는 이름을 δύναμις에서 따왔지만, 바울이 말한 능력은 부수는 힘이 아니라 죽은 자를 일으키는 힘입니다.

원어
1:20

신약이 가장 사랑한 구약 구절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는 시편 110:1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시편은 신약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거나 암시되는 구약 본문입니다. 초대교회는 부활과 승천을 이 한 구절로 설명했습니다.

역사
1:21

마술의 도시에 보낸 선언

고대 세계에는 "에베소 문자"(Ephesia grammata)라는 유명한 주문이 있었습니다. 부적에 새기거나 소리 내어 외면 악령을 쫓는다고 믿던 여섯 마디 말입니다. 온갖 신과 영의 이름을 불러 대던 그 도시에 바울은 선언합니다. 그리스도는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계시다고요.

에베소 하드리아누스 신전
쿠레테스 거리의 하드리아누스 신전(2세기). 황제와 여러 신을 섬기는 신전이 도시 곳곳에 서 있었습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역사
1:22–23

머리와 몸, 그리고 충만

22절은 시편 8:6을 인용합니다. 원래 인간에게 주신 다스림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지요. 23절의 "충만"(πλήρωμα 플레로마)은 훗날 영지주의자들이 신비한 천상 세계를 부르는 말로 가져다 썼는데, 바울은 그 충만이 다름 아닌 교회라고 말합니다. 30명 모이는 작은 교회도 그리스도의 충만입니다.

원어
2

무덤에서 성전까지

죽었던 자가 살아나고, 원수였던 둘이 한 성전이 되다

2:1

아픈 것이 아니라 죽은 것

바울은 우리가 병들었다거나 약했다고 하지 않고 "죽었다"(νεκρός 네크로스)고 말합니다. 약한 사람에게는 도움이 필요하지만, 죽은 사람에게는 부활이 필요합니다. 복음이 왜 "개선"이 아니라 "새 창조"인지가 여기서 시작됩니다.

깊은 묵상
2:2

왜 하필 "공중"일까

당시 유대인과 헬라인은 땅과 달 사이의 탁한 공기층(ἀήρ 아에르)을 영들이 머무는 곳으로 여겼습니다. 순수한 하늘(에테르)과 대비되는 곳이지요. 바울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그 세계관의 언어를 그대로 빌려, 그 권세마저 그리스도 아래 있음을 말합니다.

문화
2:3

"진노의 자녀"라는 히브리식 표현

"~의 자녀"는 히브리 사람들이 성품이나 운명을 나타낼 때 쓰던 말투입니다. "우레의 아들"(보아너게), "평안의 아들"처럼요. "진노의 자녀"란 진노 아래 놓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우리도"라고 말하며 자신을 빼지 않습니다.

원어
2:4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단어

"그러나 하나님은"(ὁ δὲ θεός). 1~3절의 어둠이 이 두 단어에서 뒤집힙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구절을 복음 전체의 경첩이라 불렀습니다. 우리 이야기가 "그러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하나님"으로 다시 시작됩니다.

깊은 묵상
2:5–6

"함께"를 붙여 만든 단어들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사,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헬라어로 세 동사 모두 "함께"(σύν 쉰)가 앞에 붙어 있습니다(쉬네조오포이에센, 쉬네게이렌, 쉬네카티센). 그리스도께 일어난 일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일어났다는 것을 단어 모양 자체로 보여 줍니다.

원어
2:7

하나님의 전시회

"나타내려 하심"(ἐνδείκνυμι)은 드러내 보여 준다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앞으로 올 모든 세대 앞에 걸릴 하나님의 은혜 전시품입니다. 작품이 훌륭할수록 칭찬은 작가에게 갑니다.

깊은 묵상
2:8

"이것"은 무엇을 가리킬까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에서 "이것"(τοῦτο)은 중성입니다. 그런데 "은혜"와 "믿음"은 둘 다 여성 명사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어느 한 단어가 아니라 은혜로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 사건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이 많습니다. 구원의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원어
2:9

명예의 사회에서 자랑을 내려놓다

로마 사회는 명예와 체면으로 움직였습니다. 부자들은 신전과 공중목욕탕을 기부하고 자기 이름을 비문에 새겼습니다. 에베소 유적에도 그런 기부 비문이 가득합니다. 바울은 구원이라는 가장 큰 건물에는 우리 이름을 새길 자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에베소 셀수스 도서관 정면
셀수스 도서관 정면의 "에피스테메"(지식) 상. 도서관은 바울보다 조금 뒤인 2세기 초, 아들이 아버지 셀수스를 기려 세운 건물로, 정면에 기부자의 이름과 공적이 새겨져 있어 명예와 기부를 자랑하던 에베소 사회를 잘 보여 줍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문화
2:10

우리는 하나님의 시(詩)

"만드신 바"(ποίημα 포이에마)는 영어 "poem"의 어원입니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딱 두 번 나오는데, 한 번은 하나님이 지으신 온 세상(롬 1:20), 또 한 번이 바로 여기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와 우리를 같은 단어로 부르십니다.

원어
2:11

"손으로 만든"이라는 아이러니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의 "손으로 만든"(χειροποίητος)은 칠십인역에서 주로 우상을 가리킬 때 쓰던 말입니다. 유대인이 자랑하던 표를 바울은 은근히 우상과 같은 단어로 부릅니다. 겉의 표로는 사람을 하나님께 가까이 데려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원어
2:12

"무신론자"가 된 그리스도인

"하나님도 없는 자"의 헬라어는 ἄθεοι 아테오이, 곧 "무신론자"입니다. 신약에서 딱 한 번 나오는 말이지요. 놀랍게도 훗날 로마 사람들은 신상을 섬기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무신론자"라고 불렀습니다. 서머나의 폴리갑이 순교할 때 군중은 "무신론자를 없애라"고 외쳤습니다.

역사
2:13

"가까이 오다"는 개종의 언어

랍비들은 이방인을 유대교로 개종시키는 일을 "가까이 데려온다"고 표현했습니다. 바울은 같은 말을 쓰되, 할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말합니다.

문화
2:14

실제로 있었던 담, 그리고 바울이 갇힌 이유

예루살렘 성전에는 이방인의 뜰과 안뜰을 가르는 낮은 돌 난간(소렉)이 있었습니다. 1871년 프랑스 학자 클레르몽-가노가 그 경고 비문을 발견했는데, 헬라어로 이방인이 이 선을 넘으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지금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바울이 체포된 것이 바로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이 담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는 누명 때문이었습니다(행 21:29). 그 담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이 감옥에서 "그 담을 허셨다"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제2성전 시대 예루살렘 모형
이스라엘 박물관의 제2성전 시대 예루살렘 모형. 성전 바깥뜰(이방인의 뜰)과 안뜰 사이에 이방인 출입을 막는 경고 비문이 붙은 난간이 있었습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역사
2:15

제3의 민족

"한 새 사람"은 유대인을 이방인으로, 이방인을 유대인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인류를 만든 것입니다. 2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유대인도 헬라인도 아닌 "제3의 종족"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역사
2:16

십자가에서 죽은 또 하나

"원수 된 것을 소멸하시고"를 직역하면 "적대감을 죽이시고"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예수님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움도 거기서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깊은 묵상
2:17

이사야의 평화 선포

"먼 데 있는 너희와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은 이사야 57:19를 떠올리게 합니다. 원래 흩어진 이스라엘을 향한 말이었는데, 바울은 "먼 데 있는 자"를 이방인까지 넓혀 읽습니다.

역사
2:18

왕 앞으로 안내받는 권리

"나아감"(προσαγωγή 프로사고게)은 궁정에서 시종이 손님을 왕 앞으로 안내해 들이는 일을 가리켰습니다. 아무나 왕을 만날 수 없던 시대에, 우리는 성령의 안내로 아버지 앞에 설 수 있습니다.

문화
2:19

체류자에서 시민으로

"외인"(ξένοι)은 잠시 머무는 외국인, "나그네"(πάροικοι)는 세금은 내지만 투표권도 재산권도 제한된 거류민이었습니다. 에베소 시민권은 대단한 특권이었지요. 바울은 이들이 하늘 도시의 "동일한 시민"이자 하나님 집의 "가족"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문화
2:20

모퉁잇돌일까, 머릿돌일까

ἀκρογωνιαῖος 아크로고니아이오스는 건물 모서리 기초에 놓아 벽의 방향을 정하는 돌이라는 해석과, 아치 꼭대기에서 전체를 잡아 주는 쐐기돌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사야 28:16을 배경으로 보면 기초돌에 가깝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 돌을 빼면 건물 전체가 무너집니다.

원어
2:21–22

아르테미스 신전 옆에서 들은 말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아테네 파르테논의 약 네 배 크기였고,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높이 약 18미터짜리 기둥이 127개 서 있었습니다. 그 그늘 아래 사는 작은 교회에게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가 성전이다." 돌 위에 돌을 쌓은 신전이 아니라 사람 위에 사람이 "함께 지어져 가는" 성전입니다.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상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상(나폴리 국립고고학박물관, 로마 시대). 데메드리오가 은으로 만들어 팔던 신상도 이런 모습이었을 것입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역사
3

감옥에서 본 비밀

이방인을 향한 비밀, 그리고 무릎 꿇은 기도

3:1

끊어진 문장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여기서 문장이 끊깁니다. 바울은 이야기를 멈추고 13절까지 긴 설명을 한 뒤, 14절에서야 "이러므로 내가 무릎을 꿇고"라며 다시 이어 갑니다. 말하다가 감격에 겨워 옆길로 새는 바울의 모습이 문법 속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또 그는 자신을 "네로의 죄수"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갇힌 자"라고 부릅니다.

원어
3:2–3

맡겨진 살림

"경륜"(οἰκονομία)이 다시 나옵니다. 1장에서는 하나님의 큰 살림살이였다면, 여기서는 바울에게 맡겨진 청지기 직분입니다.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은 앞의 1~2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깊은 묵상
3:4–5

구약이 몰랐던 것

구약도 이방인의 구원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세대에서는 알리지 아니하셨다"는 비밀은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지 않고도 똑같은 자격으로 한 몸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언자들도 그 정도까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깊은 묵상
3:6

바울이 만든 단어

"함께 상속자, 함께 지체,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 다시 "함께"(σύν)가 붙은 단어 세 개입니다. 그중 "함께 한 몸"(σύσσωμος 쉬소모스)은 바울 이전의 헬라어 문헌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없던 관계를 말하려니 세상에 없던 단어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원어
3:7

식탁 시중꾼

"일꾼"(διάκονος 디아코노스)은 원래 식탁에서 시중드는 사람을 뜻했습니다. 오늘날 "집사"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가장 위대한 사도가 자신을 부르는 이름은 "시중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원어
3:8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바울은 "지극히 작은 자"(최상급)에 다시 비교급 어미를 붙여 ἐλαχιστότερος라는, 문법적으로 있을 수 없는 단어를 만들었습니다.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은". 게다가 라틴어 이름 "파울루스"(Paulus) 자체가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원어
3:9

창조 때부터 감춰 둔 계획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 교회는 계획이 틀어져 급히 만든 대안이 아니라, 창조 때부터 하나님 마음속에 있던 설계도였습니다.

깊은 묵상
3:10

색실로 수놓은 지혜

"각종 지혜"(πολυποίκιλος 폴뤼포이킬로스)는 여러 색실로 수놓은 천이나 꽃밭처럼 "다채로운"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주인과 종,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룬 교회는 하늘의 천사들이 구경하는 하나님의 자수 작품입니다.

셀수스 도서관의 소피아 상
셀수스 도서관 정면의 "소피아"(지혜) 상. 바울이 쓴 "각종 지혜"의 바로 그 단어입니다. 지금 자리에 있는 것은 복제품입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원어
3:11–12

시민만 가진 발언권

"담대함"(παρρησία 파레시아)은 고대 아테네 민회에서 시민이 누리던 자유 발언권이었습니다. 노예나 외국인에게는 없던 권리지요. 2장에서 시민이 된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말할 권리를 가졌습니다.

문화
3:13

내 고난이 너희 영광

갇힌 사람이 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합니다. 바울은 자기 사슬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라고 말합니다. 그가 갇힌 이유가 바로 이방인을 향한 복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깊은 묵상
3:14

서서 기도하던 사람들이 무릎을 꿇다

유대인은 보통 서서 기도했습니다(막 11:25, 눅 18:11, 13). 무릎을 꿇는 것은 특별히 간절하거나 엄숙할 때였습니다. 1절에서 끊겼던 문장이 이제 무릎 꿇는 장면으로 다시 이어집니다.

문화
3:15

아버지(파테르)와 족속(파트리아)

"아버지"(πατήρ 파테르) 앞에서 "각 족속"(πατριά 파트리아)에게 이름이 주어졌다는 말은 헬라어로 들으면 말놀이입니다. 모든 가문은 결국 한 아버지에게서 이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원어
3:16–17

손님이 아니라 집주인

"계시게 하시옵고"(κατοικῆσαι 카토이케사이)는 잠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짐을 풀고 눌러사는 것입니다. 잠깐 머무는 "나그네"(παροικέω)와 대비되는 단어지요. 그리스도는 가끔 들르는 손님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집주인이 되기 원하십니다.

원어
3:18

사랑의 네 방향과 십자가

넓이, 길이, 높이, 깊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네 방향에서 십자가의 모양을 보았습니다. 옆으로 뻗은 팔(넓이), 세로 기둥(길이), 위로 솟은 머리(높이), 땅에 박힌 발(깊이). 그리스도의 사랑은 십자가 모양으로 온 우주를 재고도 남습니다.

역사
3:19

알 수 없는 것을 알게 해 달라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바울은 일부러 모순처럼 기도합니다. 다 알 수 없지만, 알면 알수록 더 넓어지는 사랑입니다.

깊은 묵상
3:20

넘치고, 넘어서, 더 넘치게

"더 넘치도록"(ὑπερεκπερισσοῦ)은 "위로"(휘페르), "밖으로"(엨), "넘치게"(페리쑤)를 겹쳐 붙인 말입니다. 기존 단어로는 부족해서 넘침에 넘침을 덧댄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넘치게 일하시는 분을 표현하려고요.

원어
3:21

편지의 전반부가 닫히는 자리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문을 직역하면 "모든 세대의, 세세의 세대까지"라는 겹겹의 표현입니다. 1~3장의 교리가 이 송영으로 마무리되고, 4장부터는 삶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원어
4

부르심에 합당한 걸음

하나 됨, 선물, 그리고 옛사람을 벗는 일

4:1

저울의 양쪽이 맞도록

"합당하게"(ἀξίως 악시오스)는 저울 양쪽의 무게가 같은 상태를 떠올리게 하는 말입니다. 한쪽에는 받은 부르심이, 다른 쪽에는 우리의 걸음이 올라갑니다. 에베소서는 1~3장에 부르심을, 4~6장에 걸음을 싣고 정확히 3장씩 나뉘어 있습니다.

원어
4:2

악덕이 미덕이 되다

"겸손"(ταπεινοφροσύνη)은 헬라 사회에서 칭찬받는 덕목이 아니었습니다. 노예처럼 비굴한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었지요.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체를 입으신 뒤로, 이 단어는 교회 안에서 으뜸가는 덕목이 되었습니다.

문화
4:3

뼈와 뼈를 잇는 인대

"매는 줄"(σύνδεσμος 쉰데스모스)은 의학 용어로 인대, 힘줄을 가리키기도 했습니다. 하나 됨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이미 이어 놓으신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원어
4:4–6

일곱 번의 "하나"

몸도 하나, 성령도 하나, 소망도 하나, 주도 하나, 믿음도 하나, 침례도 하나, 하나님도 하나. 완전수 일곱 번의 "하나"가 이어집니다. 유대인이 매일 암송하던 쉐마,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 6:4)의 메아리입니다.

깊은 묵상
4:7

하나 됨 속의 다양함

일곱 번 "하나"를 말한 바로 다음 구절이 "우리 각 사람에게"로 시작합니다. 하나 됨은 모두가 똑같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 다른 분량의 선물을 받아 한 몸을 이룹니다.

깊은 묵상
4:8

시편을 바꿔 인용한 바울?

시편 68:18 원문은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인데, 바울은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인용합니다. 실수가 아닙니다. 아람어 번역인 탈굼에도 이 구절을 "주셨다"로 읽는 전통이 있고, 유대 전통은 이 시편을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율법을 받아 백성에게 준 일로 풀었습니다. 바울은 더 높이 오르신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사람들을 교회에 선물로 주셨다고 읽습니다.

로마의 개선 행진도 떠오릅니다. 승리한 장군은 포로를 끌고 행진하며 백성에게 전리품을 뿌렸습니다.

역사
4:9–10

어디까지 내려가셨나

"땅 아래 낮은 곳"이 음부(죽은 자의 세계)를 뜻하는지, 성육신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을 뜻하는지를 두고 교부 시대부터 해석이 나뉘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신 분이 가장 높은 곳에 오르셔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깊은 묵상
4:11

목사와 교사는 한 사람?

헬라어로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에는 각각 관사가 붙는데, "목사와 교사"는 관사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목자, 곧 한 직분의 두 얼굴로 보는 해석이 많습니다. 또 교회 지도자를 명사 "목자"(ποιμήν 포이멘)로 부르는 것은 신약에서 이곳이 유일합니다.

원어
4:12

그물을 깁고 뼈를 맞추다

"온전하게 하여"(καταρτισμός)의 동사형은 야고보와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는" 장면에 쓰였습니다(막 1:19). 의사들은 부러진 뼈를 제자리에 맞추는 일에 이 말을 썼습니다. 목회는 찢어진 그물을 깁고 어긋난 뼈를 맞춰, 성도가 스스로 섬기게 하는 일입니다.

원어
4:13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키

"온전한 사람"은 단수입니다. 각자가 완벽해지는 그림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한 사람처럼 그리스도의 키만큼 자라는 그림입니다.

깊은 묵상
4:14

조작된 주사위

"사람의 속임수"의 κυβεία 퀴베이아는 주사위 놀이입니다. 속임수로 조작된 주사위를 굴리는 도박꾼처럼 교묘하게 사람을 흔드는 가르침을 가리킵니다. 항구 도시 에베소 사람들에게는 파도에 떠밀리는 배와 도박판이 모두 익숙한 풍경이었습니다.

원어
4:15

진리를 "하는" 사람

"참된 것을 하여"(ἀληθεύοντες 알레튜온테스)는 "진리"를 동사로 만든 말입니다. 진리를 말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살아 내는 것, 그것도 "사랑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원어
4:16

고대 해부학 교실

"마디", "연결", "분량대로 역사하여". 당시 의학자들이 몸을 설명하던 언어가 이 구절에 가득합니다. 머리에서 오는 공급이 마디마디를 거쳐 온몸을 키운다는 그림은, 한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문화
4:17

헛됨이라는 이름

"허망한 것"(ματαιότης 마타이오테스)은 칠십인역 전도서의 "헛되고 헛되다"에 쓰인 그 단어입니다. 에베소의 화려함 밑바닥에 흐르던 공허함을 바울은 전도서의 언어로 불렀습니다.

원어
4:18

굳은살이 박인 마음

"굳어짐"(πώρωσις 포로시스)은 의학 용어로 골절 부위에 생기는 굳은 뼈나 굳은살을 가리켰습니다. 처음엔 아프던 죄가 반복되면 마음에 굳은살이 박여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원어
4:19

통증을 잃어버린 사람

"감각 없는 자"(ἀπηλγηκότες)는 "아픔을 더는 느끼지 못하게 된"이라는 뜻입니다. 통증은 몸이 보내는 경고인데, 그 경고가 꺼진 상태를 말합니다. 양심이 아프다는 것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원어
4:20–21

과목이 아니라 사람을 배우다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철학 학파에서는 가르침을 배웠지만, 교회는 한 사람을 배웁니다. 21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라는 칭호 대신 "예수"라는 이름을 씁니다. 이 편지에서 드문 일로, 역사 속에 사셨던 그분의 삶 자체가 교과서라는 뜻입니다.

깊은 묵상
4:22–24

침례복을 갈아입던 초대교회

"벗어 버리고… 입으라"는 옷 갈아입는 그림입니다. 3세기 초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에 따르면, 초대교회는 침례 받는 사람이 입던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새 옷을 입게 했습니다. 이 구절이 그 예식 속에서 살아 움직였던 것입니다.

역사
4:25

스가랴에서 온 명령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는 스가랴 8:16의 인용입니다. 이유가 인상적입니다.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내 손이 내 발을 속이지 않듯, 한 몸끼리는 거짓말할 수 없습니다.

역사
4:26

해 지기 전 악수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는 시편 4:4 칠십인역의 인용입니다. 플루타르코스는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이 다투고 나면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악수하고 화해했다고 전합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해 질 때 끝났으니, 분노를 다음 날로 넘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역사
4:27

한 뼘의 자리

"틈"(τόπος 토포스)은 "장소, 자리"입니다. 풀지 않은 분노는 마귀에게 발 디딜 자리 한 뼘을 내주는 일입니다. "마귀"(διάβολος 디아볼로스)는 "갈라놓는 자, 비방하는 자"라는 뜻이니, 하나 된 몸을 가르는 것이 그의 일입니다.

원어
4:28

빼앗던 손이 주는 손으로

"도둑질하지 말라"로 끝나지 않습니다. 수고하여 일하고, 나아가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빼앗던 사람이 주는 사람이 되는 것, 복음은 멈추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뒤집어 놓습니다.

깊은 묵상
4:29

썩은 생선 같은 말

"더러운 말"의 σαπρός 사프로스는 "썩은"이라는 뜻으로, 복음서에서 "나쁜 열매"(마 7:17)와 그물에서 버리는 "못된 물고기"(마 13:48)에 쓰인 단어입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싱싱한지 상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원어
4:30

슬퍼하실 수 있는 분

힘이나 기운은 슬퍼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근심하신다"는 말은 성령이 인격이시라는 가장 분명한 증거 중 하나입니다. 이사야 63:10에서 이스라엘이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다"는 말씀이 배경에 있습니다.

깊은 묵상
4:31–32

용서의 기준점

31절은 분노가 자라는 순서처럼 읽힙니다. 속으로 쓴 마음, 끓어오름, 폭발, 고함, 비방. 32절은 그 해독제를 줍니다. 용서의 기준은 상대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입니다.

깊은 묵상
5

빛의 자녀, 성령의 충만

디오니소스의 도시에서 부르는 새 노래, 그리고 가정

5:1

하나님을 흉내 내는 아이들

"본받는 자"(μιμηταί 미메타이)는 영어 "mimic"의 어원입니다. 아이가 아빠 걸음걸이를 흉내 내듯,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하나님을 따라 하라는 말입니다.

원어
5:2

노아의 제단에서 온 향기

"향기로운 제물"은 노아가 홍수 뒤에 드린 제사에서 하나님이 "그 향기를 받으셨다"(창 8:21)는 표현과 레위기 제사의 언어입니다. 레위기의 모든 제사가 가리키던 것이 그리스도의 자기 내어 줌이었습니다.

역사
5:3

이름조차 부르지 말라

음란은 에베소에서 종교와도 얽혀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하지 말라"를 넘어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성도에게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문화
5:4

아리스토텔레스가 칭찬한 말재주

"희롱의 말"(εὐτραπελία 유트라펠리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미덕으로 칭찬한 재치 있는 말솜씨였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점차 아슬아슬한 농담과 저속한 입담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자리에 "감사하는 말"을 놓습니다.

역사
5:5–6

탐욕은 우상 숭배

바울은 탐하는 자를 "우상 숭배자"라고 부릅니다. 아르테미스 은 신상을 팔아 돈을 벌던 데메드리오를 기억하는 에베소 사람들에게 이 말은 날카로웠을 것입니다. 우상은 신전에만 있지 않고 지갑 속에도 있습니다.

깊은 묵상
5:7–8

어둠 "속에" 있던 게 아니라, 어둠 "이었다"

바울은 "너희가 전에는 어둠 속에 있었다"가 아니라 "어둠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빛 안에" 있는 정도가 아니라 "주 안에서 빛"입니다. 환경이 바뀐 것이 아니라 존재가 바뀐 것입니다.

깊은 묵상
5:9–10

금속을 시험하듯

"시험하여 보라"(δοκιμάζοντες 도키마존테스)는 금이나 은을 불에 넣어 진짜인지 가려내는 일, 동전이 위조인지 확인하는 일에 쓰던 말입니다. 무엇이 주를 기쁘시게 할지 삶 속에서 불에 넣어 보라는 것입니다.

원어
5:11–13

빛은 폭로하고, 또 바꾼다

"책망하라"는 드러내 밝힌다는 말입니다. 13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빛에 드러난 것은 빛이 된다고요. 빛의 목적은 망신이 아니라 변화입니다.

깊은 묵상
5:14

초대교회의 침례 찬송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는 구약 어디에도 똑같은 구절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초대교회가 침례 때 부르던 찬송의 한 대목으로 봅니다. 2세기 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이 노래의 더 긴 형태를 기록해 두었는데, 부활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노래하는 구절이 이어집니다.

역사
5:15–16

시장에서 기회를 사들이다

"세월을 아끼라"를 직역하면 "때를 사들이라"(ἐξαγοραζόμενοι τὸν καιρόν)입니다. 아고라(시장)에서 좋은 물건이 나왔을 때 놓치지 않고 사들이는 모습이지요. 여기서 "때"는 흘러가는 시간(크로노스)이 아니라 결정적 기회(카이로스)입니다.

원어
5:17

어리석음의 반대말

바울은 어리석음의 반대를 "똑똑함"이 아니라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혜는 아이큐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깊은 묵상
5:18

디오니소스가 입성한 도시

플루타르코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에베소에 들어올 때 스스로 술의 신 디오니소스처럼 꾸몄고, 여인들은 바쿠스 신도처럼 차려입고 맞이했다고 기록합니다. 술에 취해 신이 들렸다고 믿는 디오니소스 숭배는 이 지역에 익숙했습니다. 바울은 포도주에 취하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대비시킵니다.

"방탕"(ἀσωτία 아소티아)은 탕자가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허비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눅 15:13).

디오니소스 모자이크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그린 로마 시대 모자이크. 바울은 포도주에 취하는 대신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대비시킵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역사
5:19

총독이 들은 그리스도인의 노래

주후 112년경, 비두니아 총독 소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그리스도인들을 조사한 결과를 보고합니다. 그들은 정해진 날 동트기 전에 모여 그리스도를 신으로 모시며 번갈아 찬송을 부른다고요. 에베소서가 말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가 로마 관리의 보고서에까지 남은 셈입니다.

역사
5:20

"범사에" 감사

감옥에 있는 사람이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고 씁니다. 상황이 좋아서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감사이기에 가능한 고백입니다.

깊은 묵상
5:21–22

22절에는 동사가 없다

가장 오래된 사본들에서 22절은 "아내들은 자기 남편에게, 주께 하듯"이 전부입니다. "복종하라"는 동사가 없어서 21절의 "피차 복종하라"를 빌려 와야 문장이 됩니다. 곧 아내의 복종은 교회 전체가 서로 복종하는 큰 틀 안에 들어 있습니다. 게다가 21절은 18절 "성령으로 충만하라"에 딸린 분사로, 성령 충만의 열매로 이어져 있습니다.

원어
5:22–24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정 규범을 뒤집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이래로 헬라 세계에는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자녀, 주인과 종의 관계를 다룬 가정 규범이 있었습니다. 늘 윗사람에게만 말했고, 아랫사람은 명령받는 대상일 뿐이었지요. 바울은 먼저 아내와 자녀와 종에게 직접 말을 겁니다. 그들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인격으로 대한 것입니다.

에베소 테라스 하우스
에베소 언덕의 부유층 저택 "테라스 하우스". 남편과 아내, 자녀와 종이 한 지붕 아래 살던 가정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역사
5:25

남편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한 문서

고대의 가정 규범들은 남편에게 아내를 다스리라고는 했지만 "사랑하라"(ἀγαπᾶτε)고 명령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곧 죽기까지 사랑하라는 기준입니다. 바울이 남편에게 쓴 분량이 아내에게 쓴 분량보다 세 배쯤 깁니다.

문화
5:26–27

신부의 목욕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 결혼식 전에 신부가 정결하게 목욕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물로 씻어"(λουτρόν)는 그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보통은 신부 쪽에서 준비했지만, 여기서는 신랑이 직접 신부를 씻기고 단장시켜 자기 앞에 세웁니다.

문화
5:28–30

자기 몸처럼

"양육하여 보호하기를"의 두 동사는 유모가 아이를 먹이고 품어 따뜻하게 하는 모습입니다(살전 2:7 참고). 그리스도가 교회를 이렇게 대하시고,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입니다.

깊은 묵상
5:31

에덴에서 온 결혼식 주례사

창세기 2:24의 인용입니다. 예수님도 결혼을 말씀하실 때 이 구절로 돌아가셨습니다(마 19:5). 바울은 에덴의 첫 결혼이 처음부터 더 큰 결혼을 가리키는 그림이었다고 봅니다.

로마 혼인 부조
신랑과 신부가 오른손을 맞잡는 로마의 혼인 장면(덱스트라룸 융크티오)을 새긴 부조.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깊은 묵상
5:32

한 단어가 만든 교리 논쟁

"이 비밀이 크도다"의 "비밀"(μυστήριον)을 라틴어 불가타 성경은 "sacramentum"으로 옮겼습니다("sacramentum hoc magnum est"). 중세 교회는 이 구절을 결혼이 성례(聖禮)라는 근거로 삼았고, 종교개혁자들은 번역을 근거로 교리를 세웠다며 반박했습니다. 한 단어의 번역이 수백 년의 논쟁을 낳은 것입니다.

역사
5:33

다시 땅으로

그리스도와 교회라는 거대한 비밀을 말하던 바울은 "그러나"로 다시 부엌과 거실로 돌아옵니다. 가장 큰 신비가 가장 평범한 가정에서 실천됩니다.

깊은 묵상
6

사슬에 매인 대사의 전신 갑주

가정과 일터, 그리고 보이지 않는 씨름

6:1–3

예배 자리에 앉아 있던 아이들

바울은 자녀에게 직접 말합니다. 편지는 교회 모임에서 소리 내어 읽혔으니, 아이들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십계명 가운데 "약속 있는 첫 계명"(출 20:12)을 가져옵니다. 원래 "그 땅에서" 장수한다는 약속을 바울은 "땅에서"로 넓혀 이방인 아이들에게도 적용합니다.

문화
6:4

생사여탈권을 가진 아버지

로마법의 "파트리아 포테스타스"(가부장권)는 아버지에게 자녀의 생사까지 결정할 권한을 주었습니다. 원치 않는 갓난아기를 내다 버리는 일도 흔했지요. 그런 세상에서 바울은 아버지에게 "노엽게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권리보다 책임을 먼저 말한 것입니다.

역사
6:5

교회 안의 종들

당시 도시 인구의 상당수가 노예였고, 초대교회에도 많은 종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종들에게 직접 말합니다. "성실한 마음"(ἁπλότης 하플로테스)은 "한 겹의, 나뉘지 않은" 마음입니다. 겉과 속이 두 겹이 아닌 마음이지요.

로마 시대 노예 목걸이
글자가 새겨진 로마 시대 청동 노예 목걸이(로마 국립박물관). 도망친 노예를 주인에게 돌려보내 달라는 문구를 새긴 이런 목걸이가 실제로 쓰였습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문화
6:6

"눈가림"이라는 신조어

"눈가림만 하여"(ὀφθαλμοδουλία 옵탈모둘리아)는 "눈"과 "종노릇"을 합친 말로, 바울 이전의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주인 눈이 있을 때만 일하는 태도를 딱 한 단어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원어
6:7–8

진짜 고용주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고 주께 하듯". 종의 노동이 예배가 되는 순간입니다. 8절은 종이든 자유인이든 같은 기준으로 갚으신다고 말합니다. 법정에서는 차별받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똑같이 섭니다.

깊은 묵상
6:9

같은 가방에 들어 있던 빌레몬서

주인들에게 "위협을 그치라, 너희 주인도 하늘에 계시다"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두기고가 이 편지와 골로새서를 들고 갈 때 도망쳤던 종 오네시모가 동행했습니다(골 4:7–9). 오네시모의 주인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도 같은 여행길에 있었지요. 이 구절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 한 사람의 운명이 걸린 말이었습니다.

역사
6:10

1장의 힘으로 돌아가다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라". 1:19에서 쌓아 올렸던 힘의 단어들(능력, 위력, 힘)이 다시 등장합니다. 싸움의 힘은 우리 근육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살리신 그 능력에서 옵니다.

깊은 묵상
6:11

사슬 건너편의 병사

로마에서 가택 연금 중이던 바울은 늘 병사 한 명과 함께 있었습니다(행 28:16). 사슬로 병사와 손목이 이어져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전신 갑주"(πανοπλία 파노플리아)를 쓰는 바울의 눈앞에는 날마다 바뀌어 들어오는 로마 병사의 장비가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 군단병 갑옷 재현
로마 군단병의 갑옷(로리카 세그멘타타)을 재현한 모습. 바울 곁을 지키던 병사도 이런 차림이었을 것입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역사
6:12

전쟁이 아니라 씨름

"씨름"(πάλη 팔레)은 레슬링입니다. 멀리서 활 쏘는 전투가 아니라 맞붙어 숨결이 닿는 싸움이지요. 에베소의 체육관에서 레슬링은 인기 종목이었습니다. "세상 주관자들"(κοσμοκράτορες)은 신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말로, 당시 마술 문헌에서 별의 신들을 부를 때 쓰던 호칭입니다.

원어
6:13

공격이 아니라 서 있기

이 단락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동사는 "서다"(11, 13, 14절)입니다. 적진으로 돌격하라는 명령이 없습니다. 이미 그리스도가 이기신 자리를 빼앗기지 않고 "서 있는 것"이 성도의 싸움입니다.

깊은 묵상
6:14

이사야의 하나님이 입으셨던 갑옷

병사는 허리띠(칭굴룸)부터 맸습니다. 긴 옷자락을 끌어올려 묶어야 움직일 수 있었고, 칼도 거기에 찼지요. 그런데 "의의 호심경"은 이사야 59:17에서 하나님이 직접 입으신 갑옷입니다. 우리가 입는 갑옷은 원래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역사
6:15

징 박힌 군화

로마 병사의 샌들(칼리가)은 바닥에 쇠징을 촘촘히 박아 미끄러지지 않게 했습니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 성전 전투에서 한 백부장이 징 박힌 신발 때문에 매끄러운 돌바닥에 미끄러져 쓰러진 장면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평안의 복음은 흔들리는 땅에서도 버티게 하는 징입니다. 전쟁 장비 한가운데 "평안"이 들어 있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역사
6:16

문짝만 한 방패

"방패"(θυρεός 튀레오스)는 "문"(θύρα)에서 온 말로, 사람 몸을 거의 가리는 큰 직사각형 방패입니다. 가죽을 씌운 방패를 물에 적셔 불화살을 끄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로마 병사들은 이 방패를 서로 맞대어 거북 등딱지 모양(테스투도) 진형을 짰습니다. 믿음의 방패도 함께 들 때 가장 강합니다.

로마군 테스투도 진형 재현
큰 방패를 서로 맞대어 거북 등딱지 모양을 만드는 로마군 진형(테스투도)을 재현한 모습.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원어
6:17

짧은 칼, 입에서 나오는 말씀

"검"(μάχαιρα 마카이라)은 긴 장검이 아니라 근접전에 쓰는 짧은 칼입니다. 12절의 씨름과 어울리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쓰인 ῥῆμα 레마는 입으로 말해진 말씀을 강조합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기록되었으되"로 시험을 물리치신 장면이 떠오릅니다.

원어
6:18

일곱 번째 무기

갑주 목록에는 없지만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모든 기도, 항상, 모든 인내, 모든 성도". 이 한 절에 "모든"이 네 번 들어 있습니다. "깨어"(ἀγρυπνέω)는 잠을 쫓으며 보초를 서는 모습입니다.

깊은 묵상
6:19

풀어 달라가 아니라 담대하게 해 달라

갇힌 바울이 부탁한 기도 제목은 석방이 아니었습니다.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παρρησία) 알리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3:12에서 본 그 시민의 발언권입니다.

깊은 묵상
6:20

쇠사슬에 매인 대사

"사슬에 매인 사신"(πρεσβεύω ἐν ἁλύσει). 고대에도 외교 사절은 해치거나 가두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 왕의 대사가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게다가 ἅλυσις는 손목을 병사와 연결한 사슬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대사의 휘장 대신 사슬을 차고도 그는 여전히 대사였습니다.

문화
6:21–22

우편배달부 두기고

고대에는 우체국이 없었으니, 믿을 만한 사람이 편지를 들고 걸어서 전했습니다. 두기고는 아시아 출신으로(행 20:4) 이 편지와 골로새서를 함께 들고 갔습니다. 두 편지의 이 대목은 헬라어로 거의 글자 그대로 같습니다. 편지를 전한 사람은 편지를 읽어 주고 바울의 근황을 설명하는 해설자 역할도 했습니다.

역사
6:23–24

마지막 단어, "썩지 않음"

"변함없이"로 번역된 마지막 단어는 ἀφθαρσία 아프타르시아, "썩지 않음, 불멸"입니다. "하늘에 속한 복"으로 시작한 편지가 "썩지 않는 사랑"으로 끝납니다. 이 편지의 첫 단어와 마지막 단어 사이에 우리의 인생 전체가 들어 있습니다.

원어
後

그 후의 에베소

편지가 도착한 다음 이야기

약 30년 뒤, 요한계시록 2장에서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십니다. 수고와 인내, 거짓 사도를 분별한 것을 칭찬하시지만 한마디를 덧붙이시지요. "처음 사랑을 버렸다." 에베소서는 "사랑"이라는 말이 유난히 자주 나오는 편지입니다. 그 사랑의 편지를 받은 교회가 한 세대 만에 사랑을 잃었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깊은 경고입니다.

초대교회 전승은 사도 요한이 말년을 에베소에서 보냈다고 전합니다. 2세기 초에는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가 순교하러 로마로 끌려가던 길에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431년에는 이 도시에서 에베소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에베소 쿠레테스 거리 유적
쿠레테스 거리. 한때 신전과 기념비, 귀족의 저택이 늘어서 있던 에베소의 중심 거리입니다. 지금은 폐허가 된 이 길을 바울과 두기고도 걸었을 것입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에베소 사도 요한 기념 교회 유적
셀추크 언덕의 사도 요한 기념 교회 유적. 요한이 이곳에 묻혔다는 전승 위에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세운 큰 교회입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옮겨진 촛대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번성하던 에베소 항구는 강에서 흘러든 토사로 점점 메워졌고, 오늘날 유적지는 바다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내륙에 있습니다. 한때 세계를 호령하던 도시는 폐허로 남았지만, 그 도시에 보낸 편지는 지금도 전 세계 교회에서 읽히고 있습니다.